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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파의 패배와 몰락

38호  |  이광백 자유조선방송 대표  |  2012-08-01 14:20
범청학련 통일축전에서 경찰이 연세대 학내로 진입 해산시키자 시위대들이 바리케이트에 불을 붙여 진입을 막고있다. photo 연합

▲ 범청학련 통일축전에서 경찰이 연세대 학내로 진입 해산시키자 시위대들이 바리케이트에 불을 붙여 진입을 막고있다. photo 연합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고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론’을 혁명이론으로 삼아 자주와 민주, 그리고 통일운동을 진행했던 이른바 주사파 학생운동. 그들의 전성기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였을 것이다. 적어도 주사파 학생운동에 참가했던 학생들의 수는 이 시기에 가장 많았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기를 지나면서 주사파 학생운동은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에 심화되기 시작한 한총련 내부의 노선투쟁은 주사파 학생운동의 쇠퇴를 부채질했다.

1995년 전후 표면에 드러난 노선갈등의 이유는 김영삼 정부에 대한 입장과 투쟁방식, 그리고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둘러싼 의견 차이였다. 이른바 ‘자주계열’은 김영삼 정부에 대한 투쟁을 전면적으로 벌여야 하며, 폭력투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통일운동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중심으로 남북통일연대를 더욱 강화하는 차원에서 진행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반면 ‘경기인천지역총학생회연합’(경인총련)과 ‘전북지역총학생회연합’(전북총련), 그리고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일부 대학이 참여했던 ‘사람사랑계열’은 폭력도 불사할 정도로 반김영삼 투쟁을 벌이자는 주장에 반대했다. 통일운동도 각 지역에서 대중과 함께 벌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투쟁 전술을 넘어 한총련의 총체적인 혁신을 주장했다. 그 때문에 ‘혁신계열’로 분류되기도 했다.

한총련 노선갈등, 96년 연대사태 불러와
양측의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1995년 말에 있었던 한총련 의장 선거에서 양측 모두 후보를 냈다. 주사파 학생운동이 서로 다른 후보를 낸 것이다. 과거에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선거 결과 상대적으로 다수였던 자주계열 후보가 한총련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총련 집행위원회는 혁신계열이 장악하고 있었다. 집행부는 혁신계가, 의장은 자주계가 장악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1996년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양측의 갈등은 폭발했다. 자주계열이었던 한총련 의장은 연세대에 남아 끝까지 투쟁하며 김영삼 정권타도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신계열이었던 집행위원회는 8·15투쟁을 마무리하고, 지역으로 내려가 대중과 함께 투쟁하자고 주장했다. 김영삼 정부는 군사정권이 아니기 때문에 학생운동도 과거와 같이 폭력일변도의 투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총련 의장은 자신의 권한으로 집행위원회의 의견을 묵살하고 연세대에서 투쟁을 이어갔다. 정부는 학생운동의 과격성과 폭력성을 비판하며 한총련 투쟁을 강경 진압했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경찰의 진압에 의해 해산되고 체포되었다. 시대착오적인 정권타도를 내세우며 폭력적인 모습을 벗어버리지 못한 학생운동에 국민들의 시선도 냉담했다. 돌이킬 수 없는 패배였다.

폭력투쟁 일삼았던 한총련 자주계열
패배의 결과는 혹독했다. 연세대 투쟁에 참가했던 대학 신입생들은 투쟁 속에서 단련된 것이 아니라, 회의와 불신을 안고 학생운동을 떠났다. 자주계와 혁신계도 더 이상 서로를 동지라고 여기지 않았다. 투쟁해야 할 적으로 보는 이들도 생겨났다. 일부 대학이 한총련 탈퇴를 선언했고, 혁신계열의 한축을 이루고 있던 ‘전북총련’은 연세대 사태가 일어났던 그 이듬해 열다섯 개 대학이 한꺼번에 한총련을 탈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총련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주계는 의장단 회의에서 수적 우세를 이용해 집행위원회에서 혁신계를 몰아냈다. 혁신은 곧 타협이며 개량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김영삼 정권타도 투쟁의 기치를 거두지 않았고, 폭력투쟁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한총련은 97년 한양대에서 벌어진 출범식에서 프락치로 의심된다며 이석 씨를 붙잡아 심문했다. 심문과정에서 구타가 있었고, 매를 맞던 이 씨가 사망했다. 한총련 지도부는 이 씨의 사망을 은폐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총련이 사람을 죽였고, 그것을 감추려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한총련은 빠르게 몰락했다. 학생들은 한총련에 대한 지지를 거두기 시작했고, 국민들은 비난했으며, 학생운동가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총련과 주사파 학생운동의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부 노선갈등이나 연세대 사태를 자초한 전술적 실패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근본적 원인이 빚어낸 현상에 가깝다.

그렇다면 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대학가를 장악하고 있던 주사파 학생운동이 그렇게 급속하게 몰락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의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주사파, 남한을 북한처럼 만들려
주사파 학생운동은 한마디로 남한 사회를 북한과 같은 사회로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노동자, 농민처럼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된 사회를 만들고 조국을 통일하자면 우선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미국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자주·민주· 통일이었다.

미국을 몰아내자는 민족자주와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되는 ‘민중민주’를 염원했던 그들에게 북한은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이미 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자랑스러운 민족자주국가였고,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어야 한다는 민중민주주의가 오래전에 실현된 사회주의 사회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이 수백만이 굶주림으로 죽어간 비극의 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300만 명을 죽음에서 구할 수 있는 피같은 돈 8억 9천만 달러를 김일성의 묘지를 만드는 데 썼던 잔인한 독재국가라는 진실이 알려졌다. 이를 알고 난 젊은이들은 더 이상 남한 땅에 북한식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남조선혁명운동을 벌일 이유도, 의욕도, 양심도 없었다.

지하혁명조직이 해체되었고, 조직원들은 지하혁명을 중단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진보’나 ‘개혁’의 이름으로 NGO운동을 하거나 정치권으로 뛰어들었다. 포기했던 사법시험이나 의사고시를 다시 준비해 변호사가 되고 의사가 되었다. 그것도 여의치 않은 사람은 기자가 되거나 학원 강사가 되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과거의 반미의식과 감정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불신도 있다. 진보세력임을 믿었기 때문에 보수 세력에 대한 적대감도 여전하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지금까지 맹목적으로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은 소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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